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쓰자카 다이스케 (문단 편집) ====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2004년 아테네 올림픽]] ==== 마쓰자카는 직전년도 리그에서 좋은 모습[* 2003년은 마쓰자카가 [[NPB]]에서 보낸 시즌 중에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시작한 년도로도 유명하다. 이 해 기록은 16승 7패 194이닝 동안 215 탈삼진 ERA 2.83]을 보였다. 거기다가 연말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표팀에 참가해 대만전에서 좋은 피칭을 보이며 일본 대표팀의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에도 공을 세웠다. 여기에 시즌 중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 직전까지 마쓰자카는 '''18경기 8승 6패 126과 3분의 2이닝 동안 98탈삼진 ERA 3.20'''을 기록했다. 게다가 '''9완투 4완봉'''으로 리그 최고의 이닝이터다운 면모까지 보여주고 있었으니 아테네 올림픽에도 승선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올림픽에서는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s-5.3.4|쿠바와의 경기]], 호주와의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s-7.1|동메달 결정전]]에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결론적으로 팀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에 그쳤다.[* 이 올림픽은 한국과 미국이 참가하지 않은 올림픽이고 전력상 '아마 최강'으로 불리던 쿠바와 일본이 금메달을 걸고 싸우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는 그 둘이 없는 가운데 호주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아 동메달에 그쳤으니. 당초 목표보다 메달 순위가 낮았기에 오히려 아테네 올림픽은 실패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 당시 올림픽에 출전한 팀들 중 가장 강팀은 단연 쿠바였다. 쿠바는 아마 최강으로 불리던 때이기도 했고 실제 이 대회에서 '''8승 1패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유일한 1패가 일본에게 기록한 것이었는데 쿠바를 꺾는데 앞장선 첨병 역할을 한 선수가 바로 다름아닌 마쓰자카였다. 당시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s-5.3.4|쿠바전]]에 등판해 '''2회까지 퍼펙트'''로 쿠바 타선을 막아낸 마쓰자카에게 타선에서는 [[와다 카즈히로]]가 선제 2점 홈런으로 보답한다. 3회 선두 타자를 볼 넷으로 내보내며 퍼펙트가 깨졌지만 이후 세 타자를 범타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여기에, 4회에 [[조지마 겐지]]와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연속 홈런으로 4:0까지 점수를 벌렸다. 마쓰자카도 4회 두 타자 연속 안타와 5회 1안타, 7회 1안타를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출루도 내주지 않고 '''무실점으로 8회까지 쿠바 타선을 틀어막는다.''' 문제는 팀이 6:0의 스코어로 앞서있던 9회말. 다시 올라온 마쓰자카는 선두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에게 안타를 맞은 후, 2루수 실책으로 후속 타자를 내보내고 만다. 무사 1,3루에서 프레데리치 세페다를 삼진 처리하며 1사 1,3루까지 잘 잡아놓았지만 이후 두 타자에게 각각 2루타와 안타를 맞아 3실점하며 강판된다. 이후에는 이시이 히로토시가 올라왔고 쿠바는 대타와 대주자 공세를 퍼붓지만, 이시이가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추가 실점 없이 마무리하여 경기는 6:3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날, 마쓰자카는 8회까지 무실점이었지만 9회를 끝내 다 마무리하지는 못하였고 '''8.1이닝 7피안타 7탈삼진 1볼넷 3실점(2자책점) ERA 2.16'''으로 경기를 마쳐 승리투수가 되었다. 다만 4회 1사에서 151km/h의 직구를 받아친 [[율리에스키 구리엘]]에게 오른팔을 직격당하는 타구를 맞고도 9회까지 교체되지 않은 채 마운드를 지키는 모습은 일말의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당일 경기 포수였던 [[조지마 겐지]]는 몸에 맞은 후 괜찮다며 계속 던지겠다던 마쓰자카에게 "만약 너가 상태가 안좋다면, 내가 바로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거야"라고 말했다고 경기후에 [[https://bunshun.jp/articles/-/47679|밝혔다]]. 마쓰자카는 구리엘 타구에 직격당한 이후 다음 타자 오스마니 우르티아에게 141km/h의 직구를 던지며 10km/h나 구속이 떨어지자 조지마는 상태가 안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한다. 우르티아에게 안타를 맞아 1사 1,2루 상황이 되자 조지마는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쓰자카가 곧장 괜찮다고 조지마에게 사인을 보냈고 마쓰자카가 바로 다음타자부터 150km/h의 직구를 던지자 안심했다고. 이후, 마쓰자카는 두 타자를 범타처리하며 실점 없이 4회를 마쳤다.] 특히, 이날 마쓰자카는 무려 137개의 공을 던졌는데 리그에서도 많은 공을 던진데다가[* [[NPB]] 리그에서는 2004년 아테네 출전 전까지 '''9완투 4완봉'''을 기록할 정도로 철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쓰자카였다. 실제 올림픽 직전 세경기 동안 7월 19일 니혼햄전 144구, 7월 26일 다이에 호크스전 136구, 8월 2일 오릭스전 152구 '''총 432구'''를 던졌다. 지금 기준으로는 살인적인 혹사에 가깝지만 당시 일본 야구는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가 단련된다"는 논리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2004년 아테네 올림픽]] 투수진 중 마쓰자카는 출전 직전까지 126.2이닝을 던져 시미즈 나오유키(138.2이닝)와 [[이와쿠마 히사시]](138.2이닝) 다음 가는 이닝 소화력이었다. 하지만, 아테네 대회가 커리어 처음의 국제대회였던 이 둘과 다르게 마쓰자카는 프로가 되고나서 여러 국제대회를 나섰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쓰자카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일찌감치 많은 마일리지를 쌓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국가대표에서 영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천명하는 마쓰자카 본인이다. 그러나, 그 영광이 한 선수의 커리어를 잠식한 희생의 대가라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선수 개인으로 보면 프로 초년병 시절 리그에서도 많은 공을 던지고 완투를 밥먹듯이 할정도로 관리가 세심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시즌 기간이나 시즌 도중에도 국제 대회에 숱하게 불려다녔기에 마쓰자카 전성기가 2010년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다가 마쓰자카는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가 단련된다"는 일본식 피칭 이론의 신봉자이기도 했기에 본인 자체도 어린 프로 초년병 시절 관리에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어깨가 비교적 씽씽하던 2008년까지는 그럭저럭 좋은 활약을 보였고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9년 3월 WBC]]까지도 좋은 모습을 보였던 마쓰자카였지만 상술한 이유들로 인해 2009년 4월 시즌에 접어들면서부터 그의 영광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기다가 마쓰자카는 고교 시절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에서도 살인적인 [[혹사#s-5.2|혹사]]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본인이야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의 전성기가 이어지지 못했기에 그 선수 개인을 바라보는 야구 팬들 입장에서는 옛날식 피칭 이론에 심취해 선수 개인의 전성기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4회 투구하는 팔인 오른팔을 직격당하고도 9회까지 던졌기에 [[혹사#s-5.2|혹사]]라면 혹사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당시 대표팀 감독 대행이던 [[나카하타 키요시]]는 2020년 마쓰자카를 만나 당시 상황을 [[https://www.tv-tokyo.co.jp/sports/articles/2020/02/009417.html|회고하였다]]. 이 회고에 따르면 마쓰자카가 나카하타의 교체 요구를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나카하타)가 마운드에서 (트레이너 대신) 그만 던지라 말했더니 공을 버리고서 "왜 바꿔요!"하는 거 같은 거야. 내 입장은 안중에 없었지?"라며 웃으면서 물었다. 이를 듣고 마쓰자카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어렸어요."라고 나카하타에게 웃으며 사과했다. 당시 상황은 심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웃으며 당시를 회고할 만큼 감정이 무뎌진 모양. 여담으로, 나카하타는 훗날 TBS 방송에서 해설자로서 마쓰자카의 은퇴 특집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의 열정과 투수로서의 책임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다시금 언급하기도 했다. 부상 위험에도 불구하고 속투하려던 마쓰자카에게 꽤나 감명받은 모양.] * 이후, 조별 예선 잔여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했고 가장 중요한 게임인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s-7.1|준결승전]][* [[https://www.youtube.com/watch?v=Aht2r7q4VIs|당시 게임 영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선발로 등판한 이날, 마쓰자카는 여전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다. 2회와 4회에 각 한 차례씩 볼 넷으로 주자를 내보낸 것 이외에는 4회까지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타선은 상대 선발 [[크리스 옥스프링]][* 우리나라에는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선수로 잘 알려진 호주 야구 선수. 올림픽 직전까지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트리플 A팀인 포틀랜드 비버스 소속 불펜투수였다.]의 호투에 막혀 점수를 뽑지 못하였다. 5회에는 선두타자에게 호주의 첫 안타를 내주었고 희생 번트로 인해 1사 2루의 위기가 되었지만,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0:0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던 6회 초 호주의 공격에서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잘 잡아냈지만, 이후 두 타자들 좌전 안타 - 볼넷으로 내보내며 1사 1,2루의 위기가 된다. 하지만 곧장 다음 타자를 2루 땅볼 처리하며 아웃 카운트를 하나 늘려 상황은 2사 1,3루가 되었다. 이후 타자는 브렌단 킹맨[* 1루수 브렌단 킹맨은 올림픽 출전 이전에 플로리다 말린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뛴 적이 있다.]. 킹맨은 마쓰자카에게서 깔끔한 우전 안타를 뽑아내며 1타점을 올렸다. 여기서 1루 주자가 3루로 무리하게 진루를 시도하다가 아웃되어 이닝은 그대로 종료되고 만다. 이렇게 스코어는 1:0으로 6회말로 접어들었다. 6회말에도 상대 선발 [[크리스 옥스프링|옥스프링]]은 일본 타자들에게 실점 없이 이닝을 종료시켰고 그렇게 별 소득 없이 7회초 다시 마쓰자카는 마운드에 올라온다. 7회도 삼진 2개를 솎아내는 등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시켰다. 7회말 일본은 2사 1,3루 기회를 잡았지만 후지모토 아쓰시가 구원으로 올라온 제프 윌리암스를 공략하지 못했고 평범한 3루 뜬 공으로 물러나며 찬스가 무산되었다. 또 다시 별 소득 없이 8회초 마쓰자카는 다시 등판하여 첫 타자에게 중전 안타를 맞지만 이후 타자에게 투수 앞 땅볼로 병살 처리한다. 그리고 다음 타자에게 안타를 맞았고 128개로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기에 8회 2사 1루 승계 주자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그는 마운드를 내려간다. 이어 올라온 [[이와세 히토키|이와세]]가 다음 타자를 3루수 뜬 공 처리하며 승계 주자 득점 허용 없이 이닝 마무리. 마쓰자카는 결론적으로 이 날 경기에서 '''7.2이닝 5피안타 13탈삼진 3볼넷 1실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팀 타자들은 호주팀 선발 [[크리스 옥스프링|옥스프링]][* 당일 경기, 6.2이닝 5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기록.]과 이어 올라온 '''제프 윌리엄스'''[*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적인 불펜인 [[JFK(한신)|JFK]]에서 J를 맡았던 선수.][* 당일 경기에서는, 2.1이닝 3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잠재웠다.]에게 무득점으로 막히며 준결승에서 '''1:0으로 영봉패'''당하게 된다. 풀경기가 보고 싶다면 [[https://olympics.com/en/video/aus-vs-jpn-semi-final-match-baseball-athens-2004-replays|이쪽으로]]. 대회에서 쿠바를 꺾을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이던 당시 일본 팀이었지만 호주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았다. 심지어 이 대회는 미국과 한국 모두 출전을 안한 올림픽이었고 사실상 쿠바를 빼면 일본은 금메달 1순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쿠바까지도 조별 예선에서 꺾는 모습을 보였으니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28&aid=0000074870|금메달을 기대할 법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대놓고 전력이 일본에 비해 약체인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호주]]에게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호주는 예선라운드에서 대만에게도 지는 등(대만의 [[왕첸밍]] - [[차오진후이]] 계투에 막혀 0대3으로 패배했다), 4승 3패로 간신히 준결승에 진출한 상태였다. 만약 대만이 예선라운드 이탈리아전에서 9회 '''대역전패'''당하지 않았으면, 호주는 예선탈락할 수도 있었다(대신 승자승원칙에 의해 대만이 준결승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애시당초 일본과는 전력상 비교가 안 되는 팀이 호주였다는 이야기.] 다만, 호주의 경우 해당 대회에서 준결승전 이전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s-5.4.2|예선 풀리그 경기]]에서도 일본을 9:4로 꺾는 파란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 일본은 아테네 올림픽 예선 라운드 성적이 6승 1패로 이 유일한 1패를 안긴 팀이 당시 호주였던 것. 이후 준결승전과 동메달 결정전까지 모두 합하면 일본은 7승 2패를 기록했는데, 이 '''2패를 모두 호주에게 당한 셈.'''[* 호주가 아무리 전력상 일본에 비해 열세라 할지라도 당대회에서 두 팀중 우열을 가리면 야만없이므로 두 차례나 승리를 기록한 호주가 일본 대표팀에 비해 우위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상술되어있듯 전력상 우위는 당연히 일본이기에 리그전이었다면 표본이 늘어나 일본이 우위였겠으나, 단기전은 이래저래 변수가 많다.] 당일 경기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당일 선발 시미즈 나오유키가 4회 3실점하며 3:0으로 밀리다 4회와 5회 타자들이 각각 3점, 1점을 득점해주어 3:4로 일본이 재역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7회와 8회 [[미우라 다이스케]]와 안도 유야가 각각 3실점 하며 팀은 9:4의 스코어로 패배. 특히, 일본 타자들은 1득점한 5회 이후로 6회부터 별 힘도 못써보고 무기력하게 졌다. 여담으로, 일본 타자들은 해당 경기 6회부터 무득점에다 다음 준결승전 팀 완봉패까지 더해져 '''15이닝 연속 무득점'''으로 호주 투수들에게 막혀 참패를 당했다. 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다름 아닌 '''제프 윌리엄스'''[*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적인 불펜인 [[JFK(한신)|JFK]]에서 J를 맡았던 선수.]. 윌리엄스는 조별예선에서도 7회부터 9회까지 3이닝 무실점 호투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준결승전까지 2.1이닝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막아냈다. 즉, '''제프 윌리엄스'''는 일본을 꺾는데 두 차례나 혁혁한 공을 세운 셈. 여러모로, 일본 타자들이 호주 투수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제프 윌리엄스'''를 공략하지 못해 성패가 갈렸던 대회[* 실제, 단기전에서는 소위 말하는 '공 긁히는 투수'가 나오면 제 아무리 리그 내 최고 타자라 해도 단박에 공략하기는 어렵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도 있듯이, 선발 투수나 수준 높은 불펜 투수의 피칭에 힘입어 꼴찌가 일등을 이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것도 야구. 이런 사례에 적합한 케이스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호주와 일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제프 윌리엄스는 준결승전 7회 한점차의 팽팽한 승부 속 2사 1,3루의 절체 절명 위기 순간에 나와 불을 끄며 일본 타자들 방망이를 무력화 시킨 것은 압권. --이 정도면 그냥 제프 윌리엄스 혼자 일본 떨궜다고 봐도 된다.-- 여기다가, 선발 옥스프링까지 소위 말하는 '공 긁히는 날'이었기에 제프 윌리엄스의 위력에 선발 투수 호투까지 발휘되어 수준 높은 투수 두명이 나오니 준결승전에는 그냥 팀 셧아웃을 당해버렸던 것.[* 이 활약을 바탕으로 두 선수는 이후, [[NPB]] 무대를 밟게 된다.] 이렇게 약팀일지라도, 좋은 투수가 연달아 나와 총력을 다하면 아무리 강팀이라도 고전할 수 밖에 없다는 '단기전의 어려움'[* 실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 WBC]]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끈 [[김인식]] 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다. 당시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파란을 일으키며 6전 전승으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결선 토너먼트#S-1.2|준결승전]]에 진출한 상태였고, 일본전을 앞두고 있었다. 준결승 전 3일전인 일본과의 2라운드 마지막 경기 당일 [[허구연]]과의 아침식사 중 대화에서 '정말 부담스럽다. 단기전에서는 어찌될 지 모르는게 야구인데'라며 [[https://youtu.be/7AdmawjQBZE?t=8981|걱정을 드러냈다]]. 이 걱정이 현실이 되어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결선 토너먼트#S-1.2|준결승전]]에는 [[우에하라 고지]]의 호투 때문에 6:0 팀 완봉패를 당하며 최고 승률을 기록하고도 준결승에서 탈락하는 웃픈일을 겪었다.][* 멀리갈 것도 없이 당장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야구|2018 아시안 게임]]에서 [[자카르타 쇼크]]가 투수 능력으로 인한 단기전 이변의 예. 해당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야구/B조 2경기#s-3|경기]]에서도 한 수 아니 몇수는 아래인 대만의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높은 연봉을 받고 뛰는 한국의 프로 선수들이 투수전 끝에 2:1로 석패를 당했다. 조금 더 경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대 선발 우성펑의 호투에 막혀 1득점밖에 하지 못하다가 마무리 왕정하오에 틀어막히며 높은 연봉을 받고 뛰시는 우리나라 프로 선수 분들이 대만 아마추어 선수들(심지어 [[KBO 리그|KBO]]보다 수준이 낮다는 대만 프로리그 [[CPBL]] 2군 리그에서도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방출된 선수들이 태반이었다.)에게 막히면서 졌다. 특히, 우성펑은 실업팀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3회 1사에서 [[안치홍]]에게 안타를 맞기 전까지는 퍼펙트로 막아냈다. 물론, 우리나라 타자들이 못한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도 상대 투수가 잘 던져서 발생한 결과이기에 투수가 좋은 공을 던지면 단기전에서는 강팀일지라도 꽤나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이렇듯, 당일 투수가 공이 좋으면 아마추어가 프로 정예 1군 국가대표 스쿼드를 때려 잡을 정도의 이변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2004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대표팀이 호주에 패한 것과 [[자카르타 쇼크]]는 서로 다소 구별될 필요가 있다. 둘다 강팀이 약팀의 투수를 공략하지 못해 졌다는 것은 같지만, 일본 타자들은 적어도 수준 높은 투수들에게 당한 것이다. 일본 타자들을 꽁꽁 묶었던 [[크리스 옥스프링]]과 '''제프 윌리엄스'''는 둘 다 대회 이후 [[NPB]]에도 진출하였고 각각 [[KBO 리그]]와 [[NPB]]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등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다. 반면 [[자카르타 쇼크]]의 경우, 한국 타자들은 프로 선수가 아마추어에게 진 것이며 야수들은 수비에서도 뇌수비를 보여주며 프로가 맞나 싶을 수준의 플레이를 선보여 한국 야구팬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심지어, 우리를 패배시킨 그 대만의 아마추어 선수들도 [[KBO 리그]]보다 하위리그인 [[CPBL]]의 2군 리그에서 조차 뚜렷한 활약이 없어 실업리그를 전전하는 선수들이었다. 한국이 공략을 실패한 투수들이 일본 타자들이 공략에 실패한 [[크리스 옥스프링]]이나 '''제프 윌리엄스'''에 버금가는 투수들도 아니고, 같은 이변의 패배라도 이처럼 질적 차이가 크다.]에 경기 내용도 상대가 잘해서 진 한 점차의 승부였기에 이런 점들이 참작되어 일본 투타 선수들의 삽질 때문에 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와 더불어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허용된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의 일본 야구팀의 성적이 '''2000 시드니 노메달 - 2004 아테네 동메달 - 2008 베이징 노메달'''로 수난이 이어져 일본은 올림픽에서 입은 상처가 지속된다.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2000년 시드니 대회]]는 한국에 패하고 4위를 기록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3위로 동메달, 그리고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2008 베이징 대회]]에서는 또 다시 한국에 패퇴하고 4위에 머물렀다. 즉,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 2004년 대회를 제외한 다른 대회에서는 '''아예 메달을 받지 못한 셈.''' 더욱이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2004 아테네 올림픽]] 때는 '''미국도 참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은메달을 확보하고 나서는 대회나 다름없었음에도 동메달에 머물렀다는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 오히려 이런 판국에 동메달을 딴 것은 '''사실상 실패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아테네 올림픽 자체가 시즌 중에 열렸다 보니 팀 전력 안배 차원에서 각 팀 당 2명만을 차출하기를 권고했고, 팀 당 2명이 출전한 대회였기에 최정예 대표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투수 면에서는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코지]], [[와다 츠요시]], [[쿠로다 히로키]], [[이와쿠마 히사시]][* 이와쿠마는 당시 아테네 올림픽 출전 직전까지 리그내에서 13승 1패 138.2이닝 동안 111탈삼진 ERA 2.34로 발탁된 선발 투수 중 가장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출전한 올림픽에서는 약체인 네덜란드 전에서 1.2이닝 3실점 조기강판 되었고 이때문인지 이후 대회에서 어떠한 출전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리고 타격에서는 [[죠지마 켄지]], [[후쿠도메 코스케]], [[타카하시 요시노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나카무라 노리히로]], [[타니 요시토모]], [[와다 카즈히로]] 등 리그 내 최고의 투수와 타자들이 선발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최정예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직전년도 11월에 [[삿포로돔]]에서 펼쳐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엔트리와 비교해 봐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시 일본은, [[NPB]] 팀당 차출제한 없이 선수를 선발했다.] 실질적인 전력손실은 (2004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마츠이 카즈오]] 정도이다.[* 정작 그 [[마츠이 카즈오]]도 직전해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결선 리그 6경기|한국전]]에서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시 일본타선은 마쓰이-[[미야모토 신야|미야모토]]-타카하시-죠지마-후쿠도메-타니-[[이바타 히로카즈|이바타]]-오가사와라-[[니오카 토모히로|니오카]] 순으로 이렇게 구성되었다. 당시 야수구성도 내야진에 전문 [[유격수]]만 무려 4명(마쓰이, 미야모토, 이바타, 니오카)이나 포함되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이들 중 7번타자로 기용된 [[이바타 히로카즈]]는 (2003년 기준) 공격력만 봤을 때는 당시 대표팀에 승선해서는 안 되는 수준이었으나, 그럼에도 대표팀에 승선했고 심지어 '''[[지명타자]]'''로 선발출장하기까지 했다. ~~수비형 유격수를 공격하랍시고 지명타자로 기용하는 희한한 상황이다~~ 즉, 아테네 올림픽 본선 당시 일본 대표팀이 각 팀당 2명이라는 제한이 있었다고 해도, 직전 해의 삿포로대회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후에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격력이 빈약한) [[아라키 마사히로]]가 대표팀에 승선하고 대회기간 동안 주전 [[2루수]]에 무려 '''2번타자'''로 중용된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이징 당시 일본대표팀이 최정예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당시 일본야구 투타에 걸쳐 최고의 선수들이었던 [[이가와 케이]]와 [[마츠나카 노부히코]], [[아베 신노스케]]가 2004년 대표팀에서 제외되어서 아쉬운 감은 있었지만, 그건 직전해 삿포로 대회 때도 비슷한 조건이었다. 이가와와 마츠나카는 예선, 본선 둘 다 제외되었을 정도.] 무엇보다 투수진에서는 '''미스터 완투'''라고 불리는 [[쿠로다 히로키]]가 대회 내내 불펜역할을 맡았는데,[* 구로다는 직전해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결선 리그 6경기|한국전]] 때도 [[와다 츠요시]]에 이어 2번째투수로 등판해 0.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팀승리에 숨은 공로자가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6회 [[와다 츠요시|와다]]가 남겨놓은 주자 '''1사 1-2루''' 위기상황에서, 등판하자마자 한국의 [[박재홍(야구)|박재홍]]과 [[정성훈]]을 힘으로 압도하면서 위기를 탈출한다.][* 이후 200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베이징올림픽]]에서 (삿포로-아테네 당시의) 구로다 롤을 맡았던 투수가 바로 [[카와카미 켄신]]이다. --근데 동메달 결정전에서 돌이킬 수 없는 투구를 펼친다.--] 쿠로다 같은 대투수조차 팀사정상 불펜으로 돌리는 팀을 최정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다. 하지만, 타선은 누가봐도 최정예에 가깝다고 볼 수는 있었지만 투수진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과연 최정예가 맞나?'하는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쿠로다 히로키]]는 걱정과 달리 아테네에서 좋은 피칭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당시 리그에서는 그닥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구로다의 경우 아테네 출전 직전 16경기 5승 7패 ERA 4.98로 그답지 못한 성적을 내던 중이었다. 이뿐 아니라, 당시 아테네에 승선한 선수 중 안도 유야[* 올림픽 출전 직전 5승 7패 45이닝 ERA 4.40], 구로다[* 16경기 5승 7패 ERA 4.98], [[미우라 다이스케]][* 18경기 5승 6패 118이닝 ERA 4.19]는 성적 상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좋은 투수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사이토 카즈미]]라던가, [[이가와 케이]], [[카와카미 켄신]], [[아라카키 나기사]] 등은 저 셋보다도 나은 성적을 기록중이었다. 더욱 최정예의 팀을 만들기 위해 기준을 빡빡하게 잡아보자면, 당시 승선한 코바하시 마사히데[* 아테네 출전 직전 16경기 5승 7패 17세이브 ERA 4.07 기록.]도 저 넷보다도 못한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승선한 선수들 중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코지]], 이시이 히로토시, [[이와세 히토키]], [[와다 츠요시]], [[이와쿠마 히사시]] 정도를 제외하고는 '''최정예 대표팀을 꾸릴 때 발탁될만한 성적 자체가 아니었다.'''. 그나마 쿠로다는 올림픽에 출전해 매우 좋은 피칭[* 3경기 무실점 ERA 0.00]을 선보이며 본인 몫을 다하기라도 했지, 정작 안도 유야[* 1경기 2이닝 3실점 ERA 13.5]와 [[미우라 다이스케]][* 3경기 3이닝 3실점 ERA 9.00]는 올림픽에 가서도 그닥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전년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투수진 스쿼드에서 큰 차이가 없는데,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 '''감독 역량 부족의 사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안도 유야와 코바하시 마사히데는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2004년 아테네 올림픽]] 모두 출전하였는데, 이 두 선수는 2003년에는 발탁될 만 했지만, 2004년에는 뽑혀서는 안되는 성적이었다. 그 둘보다 나은 투수들이 있었기 때문. 반대로 [[키사누키 히로시]]는 2003년에 발탁했다가 2004년에는 부진하자 승선시키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대표팀 구성 시 경험적 측면과 보직을 고려할 수 밖에 없지만 보직을 고려해도 중간 계투와 마무리에서 저 둘보다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선수들은 [[이가라시 료타]][* 당해년도 37세이브로 [[센트럴리그]] 세이브 1위 및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수상, ERA 2.66 기록.], [[오카모토 신야]][* 당해년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 타이틀 수상, 75.1이닝 ERA 2.05 기록.] 등도 있었다. 그리고 경험을 강조한 발탁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것이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제대회를 경험해 본 안도 유야와 코바야시 마사히데를 아테네 올림픽에서 활용을 잘했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작 그렇게 데려간 안도 유야는 1경기 2이닝 투구, 코바야시 마사히데도 3이닝 투구에 그쳤다. 당시 일본 대표팀 전체 투수진이 총 80이닝을 소화했는데 이 둘은 5이닝 밖에 책임지지 못한 셈. 즉, 경험적 측면을 고려해 저 두 명의 투수들을 승선시켰으나, '''그 경험을 모조리 발휘하지도 못한 것.''' 이 때문에 다른 구원 투수들은 과부하 되었다. [[이와세 히토키]]는 무려 5게임을 나와 5.2이닝을 던졌고, [[쿠로다 히로키]]도 3경기 나와 무려 9이닝을 굴렀다. 이시이 히로토시 같은 경우에도 무려 4경기 5이닝 투구를 했다. -- 셋 모두 안도 유야와 고바하시 마사히데의 소화 이닝 수를 합친 5이닝 이상을 각각 혼자서 소화했다...-- 사실상, 아테네에서 저 셋이 대부분 계투진을 책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모로, 팀 당 제약을 둔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 선수 선발 및 운용 자체가 문제였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척 봐도 이래저래 아테네 투수 구성 및 운용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결과이다. 여담으로, [[와다 츠요시]]나 마쓰자카, [[우에하라 코지]]도 많은 이닝을 소화했으나 이들은 아테네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했고 본래 국제대회에서는 대회 내내 선발 투수들이 구원 투수들에 비해 많은 이닝을 던지는 편이다. 여러모로 팀 당 2명의 제약이 아예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선수 선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팀 당 2명 선수 선발이라는 제약 자체가 핵심 문제였는지 그 제약 속에서도 최선의 투수진을 구성하지 못하고 운용까지 못한 감독 역량이 핵심 문제인 것인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적어도 투수 측면에서 최정예 팀은 아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선수 선발에서 문제를 인지했기에, 일본도 2008년 베이징에서 칼을 갈고 야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래 최초로 '''프로 선수 선발에 있어 제약을 두지 않았다'''.[* 2000년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시드니 올림픽]] 때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센트럴리그]] 팀들이 선수차출을 거부했고, 결국 [[센트럴리그]] 소속 선수 중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중간계투]] 카와노 마사토와 [[주니치 드래곤즈]]의 백업[[포수]] [[스즈키 후미히로]]만이 본선에 출장했다. 또한 2004 아테네 올림픽도 상술했듯이 팀 당 2명만 차출 가능하다는 제한을 두었다.] --하지만, 정작 최정예로 선수들을 발탁해 데려갔음에도 베이징에선 노메달 4위로 대회를 마친 것은 함정... 오히려 아테네때보다도 못했다.-- 근본적으로 일본대표팀이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실상 실패한 이유는,''' 팀 구성이 최정예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카하타 키요시]] 감독의 대회기간 중 보여준, 휴식일에 상대팀 전력분석 대신 타종목 응원을 위한 경기장 방문에 쇼핑물 투어를 벌이는 등의 기행과 깽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당시 주장이었던 [[죠지마 켄지]]가 나카하타를 대신해 실질적인 감독대행 역할을 하면서 선수들을 다독여야 했다.][* 사실, 이는 동메달에 그친 선수들이나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다고 봐야한다. 전년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3승 0패로 팀을 잘 이끌었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당해 3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 때는 의식 불명 상태까지 빠질 정도로 건강상 위험이 생겼기에(다행히 이후 무사히 회복했다.) 아테네 본선에 감독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당시 대표팀 수석 및 타격코치였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감독대행으로 아테네에 팀을 이끌고 나서게 된 것.(단, [[올림픽]] 규정에 따라 나가시마의 감독 등록이 불가능하여 실제 올림픽 본선에선 나카하타가 정식 감독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기 전까진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로 뛴 것 외엔 해설자로만 활동했기에 감독 경력이 전무했고, 뒷날인 2012년에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감독직을 수락하며 처음으로 프로팀 감독을 역임했다. 즉, 2004년 아테네 당시에는 '''감독 경험 자체가 없었다'''는 소리. 그런데다가, 프로 중의 프로가 모인 국가대표팀을 처음으로 지도해본 것이니.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만한 대목.] 바꾸어 말하면, 당시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호주]] 감독이었던 '''존 디블'''[* 훗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 WBC]]와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9 WBC]],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7 WBC]] 호주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한다.]의 감독역량이 [[나카하타 키요시|일본 감독]][* [[나카하타 키요시]]는 현역 은퇴 후 [[나가시마 시게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에 복귀한 1993년에 요미우리 타격 코치로 취임하며 지도자로 데뷔했으나, 그 해 팀 타선이 리그 최하위의 타율, 득점에 그치는 등 심각한 빈타를 보여주면서 코치로서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주전 [[1루수]] [[코마다 노리히로]]와 불화를 빚어 타격 부진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물론, 시즌 종료 후 코마다가 [[원클럽맨]]을 내던지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FA 이적하는 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후 1루 베이스 코치로 전임한 1994년엔 별다른 구설수 없이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나 그 해를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퇴단하여 해설자가 되었다. 즉, 2004년 아테네에서의 [[나카하타 키요시]]는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해본 지 10년이나 지난 것에 더해 당시로써는 코치 능력에 있어서도 의문점이 들었던 인사였던 것.]의 역량보다 앞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나마 요미우리 타격코치 시절과 아테네에서의 실패가 나름 교훈이 된 것인지, 나카하타는 이후 DeNA 감독을 역임할 땐 비록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으나 만년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팀의 암울한 분위기와 해이해진 기강을 말끔히 씻어내고 [[츠츠고 요시토모]] 등의 신예들을 계속해서 육성해내며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어쨌든, 예상과 달리 은메달도 확보하지 못했으니.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동메달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사실상 실패한 올림픽'''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과 [[미국]]도 없는 상황에서 조차도 고작 동메달'''이었기 때문.[* 그도 그럴것이, 한국과 미국을 빼면 쿠바를 제외하고는 당시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력상 일본에게 다들 한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과 미국도 없는 상황에서 조차도 고작 동메달'''이라는 사실에 상처를 입을만 했다.] 결국 시간이 흘러 2021년 [[2020 도쿄 올림픽/야구|5전 전승 금메달]]로 그 수모를 만회하긴 했다. 팀은 어쨌든 [[2004 아테네 올림픽/야구#s-7.3|동메달 결정전]]에서 캐나다를 11:2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마쓰자카는 시드니 노메달의 수모를 다는 아니지만 일정정도 되갚게 된 셈.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최종 기록은 '''2경기 1승 1패 16이닝 12피안타 20탈삼진 4볼넷 4실점(3자책) ERA 1.69'''이었다.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1패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두 경기 모두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다. 특히, 쿠바에게 대회 유일한 패배를 안기는데 앞장섰고 호주전에서도 1실점 외에는 좋은 피칭 내용으로 상대 타선을 잠재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